국가가뭄정보포털

조선시대 측우기, 우택 지도 이미지 -조선시대 개성, 측우기 자료(1830년 700, 1845년 900, 1850년 990, 1851년 1250, 1853년 680, 1857년 1100, 1860년 450, 1868년 400, 1875년 680, 1877년 790, 1878년 630) 막대 그래프  -조선시대 서울 측우기 자료(1830년 1000, 1851년 1500, 1859년 1480, 1862년 750, 1869년 1400, 1874년 1520, 1878년 1300, 1886년 1200, 890년 800, 1893년 900) 막대 그래프 -조선시대 수원~강화 측우기 자료(1830년 100, 1845년 210, 1850년 1050, 1851년 680, 1853년 900, 1857년 220, 1860년 680, 1868년 1250, 1875년 450, 1877년 90, 1878년 1250) 막대 그래프 -조선왕조실록 연도별 가뭄기록건수(1380년~1880년) 꺾은선 그래프 -조선시대 광주 측우기 자료(1861년 1050, 1864년 50, 1868년 9930, 1870년 600, 1973년 680, 1877년 390, 1885년 1200, 1888년 380, 1890년 780, 1893년 30) 막대 그래프 -조선시대 경상도 측우기 자료(1863년 390, 1871년 580, 1872년 780, 1873년 380, 1890년 180, 1897년 210, 1898년 600, 1900년 590, 1902년 700) 막대 그래프

우택(雨澤)

빗물이 토양에 스민 정도를 호미나 쟁기 등의 깊이로 대강 측정하는 제도. 조선 초기부터 측우기를 발명할 때까지는 우택을 계속 측정하였다. 그러나 비가 온 후 젖은 흙의 깊이는 토양의 종류, 성질, 기본토양의 건조도에 따라 달라져서 서로 비교하기에는 어려웠다. 이 이유로 세종 때 세자로서 후에 문종이 되는 이향(李珦)이 측우기를 발명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23년(1441년) 기록에 따르면 “세자가 구리로 주조한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깊이)를 조사하였다”고 한다. 이 결과 1442년에 호조의 건의에 따라 측우기가 전국에 설치되었다. 즉 15세기 전반에 전국적으로 강우에 대해 과학적인 정량측정을 개시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과학적 정량적 강우 측정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측우기와 우택 자료는 각사등록의 기록을 발췌한 것이다. 각사등록은 각 지방 관아와 중앙 관청 사이의 각종 문서와 이를 베껴 적은 등록을 알아보기 쉽도록 새롭게 정서하여 편찬한 조선시대 연구의 기초 사료집이다.

다운로드
검색
우택(雨澤) : 지역, 관측일(양력), 보고일(양력), 강우량, 상세내용에 대한 표입니다.
지역 관측일(양력) 보고일(양력) 강우량 상세내용
TOP